© 아세안연구원 | 글: 이성재
인도네시아가 2026년 1월부터 새 형사법전(Kitab Undang-undang Hukum Pidana, 이하 KUHP)을 시행하며 80년 넘게 유지돼 온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형사법을 공식적으로 대체했다. 이번 형사법 개정은 2022년 의회를 통과한 뒤 3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 발효된 것으로, 정부는 이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 부합하는 “현대적이고 인도적인 법체계로의 전환”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국가기관에 대한 모욕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조항이 포함되면서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새로운 KUHP는 현직 대통령이나 국가기관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했다고 판단될 경우 최대 징역 3년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해당 조항이 비판과 모욕을 구분하도록 설계됐으며, 대통령의 고발이 있어야 수사가 진행되는 친고죄 성격을 띠어 권력 남용을 막는 안전장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들은 법 조항 자체가 시민과 언론의 자기검열을 강화하고,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정치적 비판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새 KUHP는 혼인 외 성관계와 동거를 여전히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신성모독죄와 공산주의 이념 관련 처벌 규정 역시 폐지하지 않고 계속 적용하도록 했다. 다만 동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조항은 시민사회 반발로 최종안에서 제외됐다. 사형제 역시 유지됐지만, 일정 기간의 유예와 행형 평가를 거쳐 감형이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법무 당국과 일부 형사법 전문가들은 비구금형 확대와 재판부의 재량 강화가 교도소 과밀 문제 완화와 범죄 피해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번 KUHP 시행은 인도네시아가 식민지 법체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인 형사법 질서를 확립하는 상징적 전환점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국가 권위 보호와 시민의 기본권 보장 사이의 긴장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다. 향후 대통령 모욕죄를 비롯한 논란 조항들이 실제로 어떻게 집행될지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수준을 가늠하는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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