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HK)


18세기 동남아시아의 특징

김인아 2013-06-04 00:00


18세기의 동남아시아의 특징

18세기의 동남아시아는 여전히 이전 시대와 같은 전통적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세력이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서서히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지배가 확립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18세기는 동남아시아의 전통세계가 보편적이지는 않더라도 지배적이었던 마지막 세기였다. 그런 면에서 18세기는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면이 강했던 18세기의 동남아시아를 살피는 일은 이후 벌어지는 유럽세력의 진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세계의 유지는 유럽세력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도서부보다는 대륙부가 더 강하였다. 수전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지닌 대륙부의 국가들은 18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왕조가 성립하지만, 여전히 국가의 성격은 이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버마, 시암, 베트남 등의 대륙부 왕조국가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주변 군소 국가들과 잦은 전쟁을 벌이며 영토 확장과 국가의 지배영역을 확장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8세기에도 대륙부의 주요 국가에서는 왕조의 흥망성쇠가 일어났다. 버마에서는 어와, 따웅우 왕조에서 공바웅 왕조가 성립하였고, 시암에서는 아유타야 왕조에서 톤부리 왕조를 거쳐 짜끄리 왕조가 성립하였고, 베트남에서는 레 왕조의 교체는 없었지만 북부(찐 가문)와 중남부(응우엔 가문)가 나누어져 각각 다른 지배자의 통치 하에 놓였다. 베트남이 메콩강 델타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도 18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주변 강대국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지만, 샨과 라오, 캄보디아에도 왕국이 존재하였다. 아마도 18세기만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많이 성립한 시기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국가구조를 이루었지만, 대체로 전통적인 세력판도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버마와 시암, 캄보디아의 왕국들은 상좌불교를 중심으로 한 왕권사상과 개인적 관계(patron-client)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를 유지한 데 비하여, 중국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베트남은 불교국가와는 다른 유형의 정치체제를 유지하였다. 과거제도를 통하여 세습적이 아닌 관리를 등용하였고, 규범적인 관료체제를 조직하는 등 중국의 모델을 차용 하여 대륙부의 불교국가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불교군주와는 달리 베트남의 \'천자\'는 인간의 이상을 초월하는 신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하였다. 전통세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대륙부의 정치지배자들은 대체로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듯 보였고, 이것은 19세기에 들어서서 유럽세력들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물론, 시암에 대해서는 이러한 생각에서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대륙부와는 달리 도서부에서는 이슬람의 전파와 미약하나마 유럽 세력들의 진출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에서 18세기는 대륙부와 도서부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슬람의 전파로 인하여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의 해안지역과 강의 하구에는 이슬람의 추종자인 술탄이 지배하는 소왕국들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도서부의 전 지역이 이러한 술탄에 의해 지배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부 자바는 전통적으로 힌두교, 불교적 영향과 토착 신앙의 영향으로 이슬람의 영향이 있긴 하였지만, 여전히 대륙부 불교국가들의 군주와 비슷한 왕권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도서부의 국가들은 대륙부와는 달리 16세기부터 진출하였던 유럽 세력들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말레이 반도는 말라카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교역로와 주석 광산으로 인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유럽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대부분의 술탄국들은 유럽 세력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허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중부 자바의 마따람 이슬람 왕국은 18세기 중엽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여 족자카르타와 수라카르타의 두 왕조로 분열되었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명무실한 왕국으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도서부 지역은 대륙부에 비해 이른 시기에 유럽세력 하에 놓이는 결과를 빚었다.

18세기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모습과는 달리 유럽세력의 진출로 인하여 동남아시아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18세기를 특징짓는 중대한 전환점은 바로 해상교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도래한 유럽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16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 이다. 이후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서 동남아시아는 그야말로 유럽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된다. 이들의 진출은 18세기말이 되면 본격화되어 19세기 중엽 이후 새로운 정치, 경제적 변화와 아울러 사회, 문화적인 큰 변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유럽세력들의 진출과 경쟁은 사실상 전통세계의 허약한 구조를 지닌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던 필리핀의 예는 18세기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매우 두드러진다. 중앙집권화된 토착 국가의 정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필리핀은 이슬람화된 남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급속도로 기독교(카톨릭) 전파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지배가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8세기에 모든 도서부가 유럽 세력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게 된 네덜란드의 경우는 오직 상업적 이윤추구에 집중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제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나 정치적 개입은 18세기 동안 극히 미미하였다. 이는 아마도 국가적 차원의 개입이 아닌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극적 개입에 연유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18세기는 전통세계의 구조와 새로운 시대적 변화가 동시에 공존한 시기였다.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전통세계의 동남아시아는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배후로 하는 유럽인들의 진출을 간과하였고, 이 지역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 또한 식민지 지배를 초래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