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HK)


[동남아에 유입된 서구문명] 동방진출의 수로 안내자 포르투갈

김동엽 2010-07-02 00:00

중세 말기 유럽사회에 유통되는 동방상품의 중계무역은 대부분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근동무역로의 동쪽 끝에 위치한 중국인이 동인도제도의 각종 향료를 모아 말레이 반도로 운반하고, 그곳으로부터는 인도 또는 아랍상인이 벵골만을 가로질러 인도로 운반하였다. 인도로부터 유럽까지의 무역로는 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페르시아만을 통과하여 바그다드를 거쳐 시리아 서안의 항구에 이르는 길이고, 또 하나는 홍해를 지나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로 연결되었다. 이곳부터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의해 지중해를 통해 유럽 각지로 공급되었다. 제3의 무역로는 실크로드를 지나 흑해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서부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지리적으로 동방상품을 원활히 공급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이는 해양진출을 통한 새로운 무역로의 개척이라는 동기를 유발했다.

동남아에서 시암(Siam)의 아유타야 왕조가 앙코르왕조(진랍)를 쳐서 멸망시킬 즈음(1432)에, 포르투갈은 모험심 강한 항해가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동방진출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었다. 항해왕자(동 쥬앙 2세)의 측근 질 아이네스(Gil Eanes)가 1434년에 당시 유럽인들에게 남하 한계선으로 생각되는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를 넘어선 것은 유럽인의 해양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카보 보자도르가 역청이 펄펄 끌고, 암흑의 바다에 괴물이 출몰하는 곳이며, 바다의 끝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적 한계의 극복은 유럽인들을 구습에서 깨어나 경험과 과학적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이후 1488년에 마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원정대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8년 마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포르투갈은 동방상품의 무역로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무역로의 이권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이슬람 세계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1507년 이집트의 맘룩함대와 격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의 자유로운 해상활동을 확보했다.

포르투갈과 이슬람제국의 대립은 양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후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이 해양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영국의 역사가 타우니(R.H. Tawny)는 “포르투갈이 동-서양의 보물창고 열쇠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보물의 진정한 주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즉, 포르투갈은 주인이기보다는 '수로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최영수. 2006. 콜럼버스 이전의 해상발견에 관한 연구 - 포르투갈의 해상활동을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10(3): 337-378.
김대성. 1987. 인도양에서의 오스만제국과 포르투갈의 대립 - 16세기 전반기를 중심으로. 『중동연구』 6(0):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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