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외국어대학교 아세안연구원 주메뉴
전체메뉴
김동엽 2010-07-07 00:00
포르투갈의 해상진출 사업은 그 이전 유럽인의 해상과 육로를 통한 원격지 상업이나 탐험여행에 비해 해상의 루트를 독점하고 이와 경합하는 다른 세력을 적극적으로 배제하여 해상에서의 영토적인 지배를 확립시키려고 한 점에서 ‘정복사업’의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정복사업을 추진하게 된 원인은 본토에서 이슬람 세력과의 오랜 싸움에 승리한 이후 정치적 통일의 강화와 새로운 영토와 교역권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당시 유럽에 번지던 종교개혁 세력의 도전에 대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국민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포함 되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정복사업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이교도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지역을 침략ㆍ정복하여 이를 종속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동아시아로 향하는 인도양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유럽으로 향하는 향료 무역로를 지배하기 위한 정복사업을 충실히 실행해 나갔다.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1511년에는 말라카를 정복하였고, 1512년에 말루꾸 제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1515년에는 호르무즈를 점령하면서 동남아와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홍해를 통한 무역루트 차단을 위해서 1513년의 아덴을 공략했으나 실패하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안부터 인도양 해역, 그리고 동남아의 일부 다도해지역에 펼쳐진 광대한 지역에 그 지배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지배영역의 중핵은 인도로서 동남아 해역에 산재한 포르투갈인의 거점을 연결하고 구성된 영역의 통치기구를 인도령 또는 인도제국(Estado da India)이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서무역의 주요한 무역루트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무역체계에서는 그 지배권을 형성하지 못했다. 즉 인도양 해역에서와는 달리 독점은커녕 동남아 지역에서의 일시적 우위조차도 만들지 못했다. 이처럼 포르투갈이 인도 서안에서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정복과 지배라는 기본적인 해양진출 목적을 이룰 수 없었던 이유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설명이 요구된다. 그 중 하나는 동남아에 이미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해상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294년경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은 말레이반도, 보르네오, 말루꾸 제도 등 도서 동남아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는 해양제국으로 발전하여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을 벌였으며, 태국에서는 14세기 중엽 아유타야(Ayutthaya) 왕조(1351-1767)가 흥기하여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해상무역 활동의 배경에는 당시 중국을 헤게모니로 한 조공무역체제가 동북아와 동남아를 포함하는 강력한 해상무역체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과 동아시아 해상무역체제는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정복하여 지배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은 정복사업을 포기하고 동아시아 무역체계에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직접 교역이 금지되었던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 역할을 담당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참고자료>
강장희. 1999. 16세기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권 참여과정에 대해. 『동양학연구』 5(0): 19-41.
조흥국. 2001. 14-17세기 동남아-중국-일본 무역관계. 『동남아시아연구』 11(2): 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