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외국어대학교 아세안연구원 주메뉴
전체메뉴
김동엽 2010-07-24 00:00
말라카 왕국은 마쟈빠힛(Majahpahit) 왕국의 한 공주와 결혼한 빠라메시와라(Paramesywara)라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의 한 왕자가 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15세기 초에 왕권계승 문제로 일어난 빠레그레그(Paregreg) 난을 피해 말라카로 건너가 중국 명조(明朝)의 도움으로 말라카 왕국을 세웠으며, 동시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15세기에 해양무역 도시로서 말라카의 부상은 중국의 국내적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명조는 자국 생산품의 해외 판로와 증가하는 외국 상품에 대한 국내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동남아와의 무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낸다. 말라카는 인도의 벵갈만, 남중국해, 그리고 자바해 지역 해상네트워크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중요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말라카는 동남아에서 인도양 무역로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로서 그 위상이 높았다. 인도와 중동, 멀리는 유럽의 상품들을 적재한 무역선이 말라카에 도착하여 동남아의 각종 향료는 물론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과 교환하는 방식의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 당시 태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등지에서 출항한 많은 무역선들이 각종 물품들을 싣고 말라카에 입항했다. 말라카에는 특별한 행정기구를 두어 다양한 외국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행위를 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말레이 귀족들은 시장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으며, 단지 입출항의 질서나 해적으로부터 해안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탐험대가 아시아에 도착하여 말라카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은 자신들이 떠나온 대서양의 조그만 항구에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들에게 말라카는 시장 이상의 의미, 즉 아시아의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고, 고아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도 궁극적으로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인 말라카를 점령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고아를 점령한 지 1년 만인 1511년에 포르투갈은 말라카를 점령한 것만 보더라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두 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동남아에는 많은 무역항들이 보다 많은 무역상들을 유인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호 무력을 동원하여 침략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지역의 물품을 노략하는 것 이외에도 무역항으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말라카는 단지 여러 무역항들 중에서 무역상인들이 자유로운 물품교환을 위한 합의된 장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점령과 시장의 독점은 그 합의된 장소의 변경을 가져왔으며, 무역항으로서의 말라카의 몰락과 함께 주변의 아체, 조호르, 자바, 아유타야, 바고, 등지의 무역항들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입장에서 말라카의 점령은 유용한 무역루트의 독점을 의미하며, 이를 기반으로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것이었다. 실제로 말라카에서 포르투갈 선박들의 동남아 물품 선적 물량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1540년부터 1580년까지 말라카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오히려 배나 증가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동남아 무역항의 관행, 즉 다양한 무역상들이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하는 관행에 무력을 동원한 독점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도입을 의미하며, 이는 이후 동남아 무역과 무역항의 관행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였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고자료>
양승윤. 2002. 동아시아 무역거점으로의 말라카 왕국에 관한 연구. 『東南亞硏究』 제11권: 159-192.
Hall, Kenneth R. 2004. Local and International Trade and Traders in the Straits of Melaka Region: 600-1500. Journal of th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47(2): 213-260.
Reid, Anthony. 1990. An \'Age of Commerce\' in Southeast Asian History. Modern Asian Studies, 24(1):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