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교류는 BC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이때부터 인도양은 유럽인들 사이에 미지의 대양이 아니었으며, 15세기 말 포르투갈이 ‘인도양을 최초로 항해했다’는 것을 근거로 독점적 해상권을 주장한 것은 한낮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세기부터 로마는 인도양 연안의 다양한 국가들과 정기적인 교역관계를 수립한 것으로 나타난다.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보(Strabo)에 따르면, 수백 척의 선단이 중국의 비단, 인도의 모슬린, 그리고 값비싼 향료 등을 로마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7세기에는 중국상인들의 해상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와 중국 간의 무역이 활기를 띄었다. 7세 말경 말라카 해협을 통한 해상무역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었으며, 이는 곧 남부 수마트라 팔램방(Palembang) 강에 있는 항구에서 스리비자야(Sri Vijaya) 제국이 등장하는데 일조하였다. 스리비자야 제국은 인도 남부 타밀족의 촐라(Chola)왕국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거의 100여년 가량 상호간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두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인도양의 해상무역권은 아랍인들의 손에 넘어갔으며, 말라카 해협은 해적들이 자주 출몰함으로써 해상교역의 거점으로서 큰 타격을 받았다. 1292년에는 쿠빌라이 칸이 여러 차례 해군을 파견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질서를 회복하기도 했다. 15세기 명나라 정화의 원정은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의 해상교역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5세기 말 말라카는 무역항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 무렵 말라카의 술탄(Mahmoud Shah)은 상업과 해양의 이용에 관한 원칙들을 정리하여 해상법규(maritime code)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해양에서의 주권자’로 간주되는 선장의 권리와 선원들의 권리, 그리고 해상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과 선박과 관련한 무역조직에 관한 조항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선박이 일단 항구에 정박하게 되면 선장의 독점적 권한은 관할 항무관(Shahbander, Harbor Master)에게 이관된다. 유사한 법규가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Macassar)에도 존재하였으며, 비록 법규화 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유사한 원칙들이 다른 아시아 해상국가들에서 적용되고 있었다. 선박이 강이나 항구를 떠나 공해에 있을 때에는 자유로운 항해를 인정하고, 해적에 대해서는 해상세력의 공조를 통한 대처를 인정함으로써 항해의 안전을 유지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영토의 지배권은 중요시 했지만 해상무역과 항해를 위한 해양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는 동양의 제국들이 일찍이 함포를 장착한 해군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또한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아시아 해역에서 이렇다할 해전이 발생하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한편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암흑의 시대를 지나 13세기부터 유럽의 국가들은 해양의 많은 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터무니없는 영해권 주장에 앞서 베니스는 아드리아해 전체에 대한 독점적 주권을 주장했고, 영국은 그 실체도 불분명한 브리티시해의 주권을, 덴마크는 북해에 대한 주권을 각각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어업, 무역, 항해 등에 수많은 논란을 낳았으며, 이러한 논란은 종종 험악한 전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로티우스(Hugo Grotious, 1583-1645)의 ‘Mare Liberum’ (The Freedom of the Sea)원칙은 그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그의 제안에 의해 처음 시행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아시아에서 시행하고 있던 자유로운 항해와 무역을 참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그러한 관행을 관찰하여, 당시 존경받던 로마법에 의거하여 그 원칙과 교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를 유럽인들에게 가장 현명한 관습으로서 제시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국가인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원칙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사실이 유럽에서 유래한 근대 국제법에 이러한 원칙을 소개한 공로를 삭감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먼저 실행되었고, 유럽인에 의해 국제법에 소개된 \'Mare Liberum\'은 시대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또한 그 의미가 자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해양에서의 자유’ 원칙에서 ‘자유’가 무법(non-regulation) 혹은 자유방임(laissez faire)로 변질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럽세력들은 대양을 건너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약소국을 겁박하고, 굴복시켰으며, 종국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것을 허용하는 정당성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출처>
Anand R. P. 1981. Maritime Practice in South-East Asia until 1600 A.D. and the Modern Law of the Sea. The International and Comparative Law Quarterly, 30(2): 440-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