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향료와 같은 환금작물(cash cropping)이 생산되고 외지와의 교역이 번성하면서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정착지가 등장하였으며, 새로운 엘리트가 나타나는가 하면 과거의 엘리트가 몰락하기도 했다. 또한 쌀 경작과 연계되었던 보다 안정적인 신분관계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환금작물의 생산과 수집, 그리고 교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기인한다. 환금작물이 국제교역에 나오는 데는 어김없이 농부와 교역상인 사이에 중간상인이 존재한다. 이들 중간상인은 마을의 큰손(big men or chief)이거나 항구지배자(port ruler)로서 농부에게 경작에 필요한 초기자금을 지원해 주고, 그 대신 수확물의 대부분을 이들을 통해 거래토록 했다. 농부들이 외국 상인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환금작물의 거래 관행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8세기 반덴(Banden)의 사례이다.
“농부는 그들이 빚지고 있는 지배자(chiefs)에게 생산한 후추를 한 바하르(bahar, 180kg)당 1/2 리알(real)을 받고 넘긴다. 이 후추는 술탄에게 7 리알의 고정가격에 넘기고, 다시 술탄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에게 독점계약 가격인 12-20리알에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재물을 축척한 기업가인 상인귀족(Orangkaya)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교역물품을 독점할 뿐만아니라, 이를 생산하는 토지와 노동력도 지배했다. 이들은 주로 계절적 이주자들로 하여금 돈과 농기구, 그리고 쌀 등을 대여하여 밀림을 개간하도록 하고, 그곳에 후추와 그들의 생계에 필요한 농작물을 경작하도록 했다. 농부들은 수확한 후추를 기업가에게 팔도록 하며, 개간한 토지는 농부의 소유로 남았다. 이처럼 기업가는 새로운 후추생산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물품의 교역이나 외부세계와의 연계를 통제하는 통치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비록 농부가 기업가에게 빌린 부채를 모두 변제하더라도 그에게 후추를 팔아야 하는 의무는 지속적으로 남았다.
땅은 풍부한데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노동력의 확보는 새로운 생산지역을 개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1511년 이전 말라카의 언덕에서는 도시 상인귀족들의 노예들에 의해 환금작물이 경작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1세기 후에는 반덴(Banden)에서, 그리고 17세기에는 아쩨(Aceh)에서 이와 유사한 경작형태가 나타났다.
<출처>
Reid, Anthony. 1993.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 Volume Two Expansion and Crisi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3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