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해상교역 네트워크의 형성은 BC 3세기 한(漢, BC206~AD220)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동남아에서 남인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국가들이 한무제(漢武帝, BC156~87) 이래 중국에 조공(朝貢)을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의 해상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시기는 후한(後漢)이 쇠락하고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AD220~280)에 들어서 이다. 특히 남쪽에 위치해 있던 오나라는 내륙교역이 차단되어 있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동남아를 통한 해상교역을 중요시 했으며, 이는 동남아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거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동남아에서 동서무역의 거점으로 부남(扶南, 푸난)이 흥기하였으며, 부남은 상당한 수준의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양서(梁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618)나라를 이은 당(唐, 618~907)나라는 동남아 각지에 있는 국가들과 조공관계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7세기 후반 동남아에서는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 남부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흥기하였으며,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펼쳐 15개의 속국을 거느린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동서교류의 요충지인 말라카해협과 순다해협을 장악하고 중국과 인도 간의 교통로를 드나드는 선박을 통제했다.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은 당승(唐僧) 의정(義淨)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당시 해상교역을 담당하는 시박사(市舶使)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대 동남아교류는 광주(廣州, 광저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8세기를 전후하여 동아시아 해상교역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8세기 중반 중동지역에서 흥기한 압바스 왕조는 해상무역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는 페르시아인과 아라비아인들이 동서교역을 담당하는 중개상으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8~9세기는 당나라에서 동서를 잇는 육로교류가 줄어들고, 동남아를 관통하는 해상교역의 중요성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는 당태종 이래 서북지역에 대한 정복사업으로 육상실크로드가 활성화 되었지만, 무측천(武則天, 624~705) 이래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영향력이 점차 감퇴하게 되었고, 특히 751년에는 안서절도사 고선지가 탈라스전투에서 압바스 왕조에게 대패하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으로 인해 더 이상 중앙아시아를 돌볼 겨를이 없게 되었다. 또한 7세기 이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티벳(Tibet)족의 토번(吐藩)이 돈황(敦煌, 뚠황) 일대를 정복함으로써 육상실크로드로 진입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양자강 델타유역을 중심으로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해상실크로드가 동서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당대 이래 진전되기 시작한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로 인해 동남아의 해상에 중국범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송·원 시대에는 대 동남아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당말에서 송(宋, 960-1279)대에 이르는 시기는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서 원예작물의 재배와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전국적인 상업망과 상업도시가 생겨났다. 이 시기 동남아와의 교류관계는 남송의 주거비(周去非, 저우취훼이)가 쓴 『영외대답(嶺外大答)』에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 중 동부자바의 꺼다리(Kediri, 마타람의 일정기간)와 스리비자야가 가장 번성하는 국가로 묘사되어 있다. 송대의 조여괄(趙如适, 짜오루꾸아)이 지은 『제번지(諸番志)』에도 꺼다리와 스리비자야를 포함하여 중국에 조공을 바친 국가들이 명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이미 필리핀 지역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교역에 포함되기 시작함으로써 동남아 전체가 중국의 조공무역체제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중국과 동남아 관계의 지리적 확대뿐만 아니라 교류물품의 수량과 품목에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제번지(諸番志)』 그리고 『운록만초(雲麓漫鈔)』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과 동남아의 거래품목은 3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남아에서는 주로 토속의 귀중품이나 향료가 주를 이루었으며, 중국에서는 자기(瓷器)가 가장 대표적인 교환 품목이었다. 송나라의 동전도 동남아에서 두루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송나라의 동전이 동남아 각지에서 통용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국제화패의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송나라를 이은 원(元, 1271~1368)나라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동서 해상무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이러한 정책은 송·원대에 중국선박들이 인도에서 동남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이르는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시기 중국의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중국인이 동남아 각지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활발히 전개되던 중국의 대 동남아 해상교역은 명(明, 1368~1644)나라 때에 들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명나라는 유가(儒家)경전에 기초한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대외관계도 상하관계에 입각한 조공체제를 강조하였다. 1371년에는 해금(海禁)정책을 통해 조공을 통한 공식적인 거래 이외에 사적인 교역을 금지시켰다. 1405년부터 1433년간 7차례에 걸쳐 수행된 정화(鄭和)의 대원정도 명조(明朝)에게 알려진 모든 세계를 조공체제 안으로 끌어 들이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원정의 규모나 행태적 측면에서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측면이 강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 무역질서를 엄격한 조공체제로 묶어두려는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동서간의 교역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지배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까지는 베니스와 제노아상인들이 지배했으며, 홍해에서 인도까지는 아라비아상인들의 수중에 있었고, 인도에서 중국까지는 대략 중국, 동남아, 아라비아상인들이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콘스탄디노플을 중심으로 오스만 터키가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자연히 향료무역항이 차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서 유럽의 향료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는 향료를 구하기 위한 서유럽국가들의 대항해 경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가 하나의 교역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참고자료]
양승윤, 황규희 외. 2003. 『동남아-중국관계론』.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