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왕조역사에 있어서 조공체제는 중화사상의 핵심을 이루며 대외관계의 기본틀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조공체제는 주변국들에게 있어서 외교관계뿐만 아니라 무역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외교적 행위는 중국왕조가 중화사상을 구현하는 수단이었으며, 무역은 주변국들이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조공무역은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였으며,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역의 시대’ 동남아와 중국의 무역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중국의 황제는 모든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하늘이 세운 것이라 주장했다. 만약 해외의 백성들이 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언재까지 중국의 백성들이 그의 지배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조공은 중국조정의 특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중요한 통치 도구의 하나였다. 조공제도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기도 했다. 송대에는 조공제도가 주로 방어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몽골은 팽창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청대는 외교관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초하여 정치적 안전을 도모하기 원했다. 조공제도는 오랑케들을 중국화 시켜서 중국이 약할 때에도 중국의 우월성에 동의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오랫동안 조공체제가 유지되었던 이유는 중국뿐만 아니라 입조국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기는 무역에 있었으며, 조공체제 자체가 입조국의 관점에서는 무역을 위한 훌륭한 매개체였던 것이다.
중국조정에서는 조공단의 크기에 제한을 두었으며, 한 조공단은 관원과 수하들을 합하여 100명을 초과하지 못하였다. 그 중 20명만이 수도에 가고, 나머지는 중국국경 지방관의 보호 하에 그 곳에 머물렀다. 바다를 통한 입조하는 배는 3척 이하로 구성토록 하였으며, 인원은 100명 이하로 제한하였다. 조공 자체는 중국황실에 이득을 가져오지 않았다. 조공물품은 지역 특산물로서 조공을 바치는 국가의 결실을 바친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물품은 조공으로 바칠 수 없었다. 조공단은 보통 상인들을 포함했으며, 이들은 개인이기도 하고 무역을 독점하는 왕실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무역할 물품을 가져와 국경시장에서 중국인 상인들에게 팔기도 하고, 조공단을 따라 조공단 숙소 근처에 마련된 특별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금지된 품목도 있었는데, 이는 유물, 군수품, 초석(화약제조용), 구리, 철 등으로서 이들 물품은 안보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것들로 간주되었다. 해양 국가들을 위해서는 시장이 광둥(Canton, 廣東)에 있었다. 조공 선단은 관세를 면해주었으며, 선박에는 금수품, 중국인 승객, 그리고 배에서 필요로 하는 수량 이상의 쌀이나 곡식을 실어 나를 수 없도록 했다.
중국 조정에게 중요한 것은 조공의 도덕적 가치였다. 그러나 주변국에게 중요한 것은 무역의 물질적 가치였다. 이러한 상이한 가치의 마찰은 외국무역이 확대되고, 일부의 경우 공식적인 조공형식이 무시되는 경우에서 나타났다. 조공은 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한 이래 지속적으로 중국 관료의 관념을 사로잡고 있었다. 1502년에 중국 중북부 깐수(Kansu, 甘肅)의 지방관은 서쪽 지역으로부터 중국에 입조하는 지배자(王)가 150이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1604년에 중앙아시아를 건넌 예수회 수도사(Benedic de Goez)는 어떻게 카라반 상인들이 “왕의 이름으로 된 공문을 위조하여, 중국 황실에 왕국의 외교관으로 가장하는 지”를 기록하고 있다.
정화(Cheng Ho, 鄭和)의 원정은 시대적 사건이면서도 그 목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원정 당시 정화는 약 40개의 국가를 방문했고, 이들 대부분은 중국 함대를 통해 조공단을 보냈다. 이 공식적인 원정은 중국의 사무역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지역의 조공은 정화 원정 이전 (기록에 따르면)서기 132년부터 존속해 왔다. 정화의 원정은 미지의 땅을 개척한다기보다는 기존에 구축되어 있는 무역루트를 탐구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화의 원정 이후 동남아로부터의 조공은 오히려 감소하였지만, 무역은 증가한 것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이때에는 이미 주변국이나 이 지역의 아랍상인들이 중국의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더 이상 광동까지 오지 않았다. 대신 샤먼(Amoy, 厦門)과 광둥에서 거대한 정크선들이 중국의 물품을 동남아 군도의 여러 곳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 유럽세력의 진출은 실제적으로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 이미 번창하고 있었던 동아시아 정크무역의 일부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조공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1500년 이후 조공관계를 거부한 유럽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중국의 무역이 팽창하면서 부터였다. 한때 아랍인에 의해 중국과 동남아의 무역이 지배되던 것이 중국인 상인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럼으로써 동남아로부터의 무역상은 더 이상 중국에 가지 않고, 오히려 중국인들이 그들에게 오게 되었다. 이처럼 외국인이 가져오는 무역이 줄어들자, 조공 또한 덩달아 줄어든 것이었다.
[참고자료]
Fairbank. J. K. 1942. Tributary Trade and China\'s Relations with the West. The Far Eastern Quarterly 1(2): 129-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