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세기 동남아 해상무역의 특성과 변화: 포르투갈의 진출과 영향을 중심으로
Nature and Changes of Southeast Asia Maritime Trade in 15~16 Century: Focused on Portuguese Contact and Influences
김동엽 (연구교수, 동남아지역원)
1. 서론
본 연구는 외부세력으로서 근대 이후 동남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서구세력의 초기 진출, 특히 포르투갈의 진출이 동남아 해상무역에 미친 영향을 고찰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동남아의 근대화 혹은 서구화 과정의 일면을 조망하였다. ‘동남아 문명’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동남아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임에도 불구하고, 고전시대에 관한 기록의 미비로 많은 부분 상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동남아 문명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외부문명의 능동적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동남아를 이해하려고 한다 (Coedès 1968). 이는 곧 동남아를 ‘인도화’나 ‘중국화’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연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동남아에 전파된 외부문명은 동남아적 토양에 맞추어 정착되었으며, 또한 동남아 사회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인도나 중국의 문명은 동남아의 종교와 왕권사상 등 전통적인 풍습과 권위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무역루트를 통해 전파된 이슬람은 동남아의 종교적 지평을 재구성했다. 이후 도래한 서구문명은 동남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자본주의적 문화’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각주생략]
보통 ‘서구화’는 동남아뿐만 아니라 15세기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간 근대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16세기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는 동남아의 ‘서구화’에 대한 고찰이자, 동남아 근대화 초기단계의 외부문명 전파와 수용의 맥락에 대한 고찰로서 의미를 갖는다. 동남아는 외부문명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해 왔으며, 이는 이미 인도문명과 중국문명, 그리고 이슬람의 전파과정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서구문명이 진출할 시점에서의 동남아는 이미 다양한 외부문명의 영향으로 복잡한 사회문화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서구화는 동남아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구조화된 다양성을 넘어 내재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Benda 1962). 이는 서구화가 다양한 외부문명의 영향에 의해 구조화된 동남아의 다양성을 초월하는 근대적 가치, 즉 자본주의적 문화를 동남아 전역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남아의 서구화 과정에 대한 연구는 동남아 문명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통합된 동남아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역사적 시대구분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구조적 변화와 일치한다 (Benda 1962). 15-16세기는 유럽에서는 봉건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에서는 경제적으로 역동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전통적인 전제체제가 차츰 덜전제적인 체제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Lockard 1995). 리드(Reid 1990)는 15세기에서 17세기를 ‘교역의 시대(Age of Commerce)\'로 구분하고, 동남아 전역에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봤다. 이 시기에는 초기 유럽과의 접촉이 있었고,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동남아의 중요한 제국들, 즉 아유타야, 마타람, 리왕조, 그리고 아쩨 등이 등장했다. 이처럼 15~16세기는 구조적 관점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가 재구성되는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이다.
반도와 군도로 구성된 동남아의 지리적 특성은 일찍이 해상무역의 발달을 가져왔다. 무역을 통한 새로운 물품의 유입은 소비패턴의 변화와 생산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유발시켜 경제구조의 변화를 촉진했고, 더불어 유입된 종교와 사상은 정치적 권위체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싹트게 함으로써 정치적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업활동이나 무역방식의 변화는 부의 생산과 분배체계, 그리고 이를 통제하는 정치체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를 낳는다. 14세기 이후 급속히 성장한 동남아 해상무역은 동남아국가들이 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체제를 갖추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Lieberman 1993). 따라서 해상교역의 특성과 변화에 대한 연구는 동남아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과 관련하여 연구된 국내의 문헌은 극히 제한적이다. 동남아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이 동아시아 해상으로 진출하는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일부 행태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들이 일부 존재한다 (강장희 1999, 2001; 길인성 1995; 김대성 1987; 양승윤, 황규희 외 2003; 이승용 1997; 최영수 2005, 2006; Ptak, 신용철 1985). 그리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과 영향을 소개한 연구들도 있다 (김성원 2005; 양승윤 2002). 김성원(2005)은 포르투갈의 진출이 미얀마에 항구도시의 번성과 함께 많은 부를 축적하게 하였고, 또한 새로운 무기와 병술을 통해 군사력의 증강을 가져와 따웅우 왕국이 미얀마에 통일왕국으로 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논하고 있다. 한편 말라카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양승윤(2002)은 포르투갈의 점령이 아시아 무역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두 연구 모두 포르투갈이 동남아에 진출하여 남긴 영향을 지엽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본 연구가 다루고자 하는 동남아의 서구화 과정 초기단계를 포괄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한편 외국의 학자들은 서구의 동아시아 진출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내놓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에 관한 연구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Benthencourt and Curto 2000; Borschberg 2004; Boyajian 1993; Subrahmanyam 1993; Sarkissian 2000; Scott-Ross 1971; Veen 2000; Winius 2001; 외). 또한 다양한 동남아 역사서들은 15-16세기 동남아 사회와 해상무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Hall 2004; Reid 1991, 1993a, 1993b; Tarling 1999).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과정과 초기 통치에 관한 내용을 각종 사료들을 바탕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리(Lee 2005)의 논문은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배경과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이다.
본 글에서는 우선 15세기 동남아 해상무역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며, 또한 그 행태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해상무역의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외부적 영향의 유입 통로가 되는 무역네트워크의 특성과 교역품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동남아가 외부의 어떠한 특성과 연계되었는지를 알아보고, 당시의 소비패턴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고찰했다. 둘째로 무역의 환경과 조건, 그리고 내부시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무역방식의 제도화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발달양상을 고찰하였다. 셋째로 통치자와 상인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해상무역의 확대가 정치적 권위구조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무역의 주체인 상인이 근대화의 주역이자 자본주의 주도세력인 도시 자본가로 발전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어서 16세기 포르투갈의 진출이 기존의 동남아 해상무역의 특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였다.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 배경과 함께 동남아 해상무역에 새롭게 도입한 요소인 ‘식민지 구축과 신무기 도입’, ‘카르타즈(Cartaz, 통행증) 제도의 실시와 무역독점’, 그리고 ‘기독교의 전파와 카사도(Casado, 혼혈) 정책’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포르투갈의 진출이 동남아 근대화의 진전과 자본주의적 문화의 확산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찰하였다.
포르투갈의 동남아 진출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이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작성된 각종 명령서나 보고서, 그리고 포르투갈 역사가들이 기록한 사료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가치가 의문시 되는 측면도 다수 발견된다.[각주생략] 이처럼 사료들이 가지는 객관성의 문제는 사료의 인용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준다. 본 연구에서는 논지의 전개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을 기존의 연구들에서 찾아 분석하고 재구성하여 사용하였다. 다양한 문헌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필자는 싱가포르 국립대학, 동남아연구소를 방문하여 문헌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말라카를 방문하여 포르투갈이 남긴 역사적 흔적과 포르투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정착지를 방문하여 실시한 인터뷰 내용 등이 본 논문의 작성에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