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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선 2024-06-26 14:54
1980년대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킬링필드로 잘 알려져 있다. 아세안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필요했기에 그 당시만 해도 5개국이었던 아세안 국가들이 외교적으로 UN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베트남에서는 크메르루주(Khmers rouges)의 킬링필드로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국제 여론전을 펼쳤고 아세안에서는 크메르루주(Khmers rouges)의 킬링필드가 나쁘지만 그래도 주권이라는 개념이 있는 다른 주권국의 내정 간섭을 위해 전쟁하면 안 된다는 외교전을 펼쳤다. 궁극적으로 UN에서 아세안의 외교전이 성공했다.
이와 관련한 외교활동을 통해 이들은 아세안으로 협력하면 우리가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자각했다. 그 이후 5개국들이 아세안에 대해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80년대, 90년대 지나면서 아세안은 확장되었다. 90년대에 내륙에 있는 동남아시아 개별국도 아세안에 합류하였다.
아세안 초기 설립 당시 해양 동남아시아와 내륙 동남아시아는 체제적으로 적대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1967년도에 아세안이 만들어졌을 때, 5개국의 외교부 장관들은 아세안의 정치적인 비전으로 동남아시아를 전부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내륙 동남아시아의 개별국은 공산화되어 적국이었지만 지역통합의 의미에서 내륙의 공산 체제들도 함께 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 비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2022년부터 동티모르가 가입후보국으로 승인되어, 곧 동남아시아 전체 11개국으로의 확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세안 +3, +6. 그리고 RCEP
아세안은 원래 5개 국가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10개 국가가 정식 구성원이다. 1990년대에 다른 국가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여 정치적 비전을 이루었고, 이는 아세안이 아시아의 주요 지역 기구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현재 아시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 기구들은 아세안에서 파생되었다.
이러한 아세안 파생 기구 중 하나는 '아세안 지역 포럼(ASEAN Regional Forum)'으로, 이 포럼에는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3(ASEAN+3) 기구에는 한국, 중국, 일본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세안+6(ASEAN+6) 기구에는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추가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이라는 다자 자유무역체제도 존재하며, 이 체제는 아세안+6 국가에서 인도가 제외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아세안이 처음 5개국으로 미미하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통합을 위한 엄청난 노력으로 현재는 아세안 커뮤니티라는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힘의 논리로 이해되는 국제 관계와는 달리, 신뢰 관계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역통합을 의미한다.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개인뿐만 아니라 상호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지금 아세안 커뮤니티이다. 서로를 믿고, 이웃을 생각하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세안은 1967년 처음에는 한 장짜리 계약서로 시작을 했다가 2007년 40년의 역사를 거쳐 헌장을 제정하였다. 아세안 자신들만의 헌장으로 그 내용은 아세안의 목표, 원칙, 의사결정 방식, 분쟁 해결 기구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세안은 지역통합과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