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HK)

홈자료>연구자료(HK)>동남아 개별국

[미얀마] 미국 뉴욕 미얀마불교미술전 도록 1: 미얀마 국가의 건설 2

주경미 2015-05-15 00:00

이하 글은 도록에 소개된 실비아 프레이저와 도날드 스타트너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2)

----


미얀마의 고고학은 인도의 총독이었던 커즌(Curzon) 경이 1901년 공식적으로 만달레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역사적 보존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컸던 커즌 경은 1886년 미얀마를 합병한 이후 만달레이 왕궁을 방문하고 그 처참한 상태에 놀라서 왕궁의 보호 및 복원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 설립된 버마 고고학 조사국(The Archaeological Survey of Burma)는 인도고고학조사국(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미얀마 유적 보고서를 포함한 연간 출판물을 발표하였다. 초기의 연구는 대부분 비명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학 조사국의 첫 담당자는 에밀 포차머(Emil Forchammer, 1851-1890)였다. 그는 팔리어 학자로서 비명 연구, 미얀마 법, 여카잉주의 특색 등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토 세인 코(Taw Sein Ko, 1864-1930)는 중국계 버마인으로서 공무원 출신이다. 그는 1893, 버마의 차관보로서 몬지역을 여행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몬족의 고대 유물을 양곤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하였다. 그는 1904년 버강의 아난다 사원 인근에 첫번째 고고학 박물관을 개관하여 석조 비명과 건축 장식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 뒤를 이은 찰스 드루와젤(Charles Duroiselle,  1871-1951)는 역시 팔리어 전공의 비문 연구자였다. 그도 만달레이 왕궁과 불교 유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940년 드루와젤의 뒤를 이어 루 페 윈(Lu Pe Win,  1919-1958)이 고고학조사국을 담당하였다.


1910329, 4명의 학자가 버마 연구회(the Burma Research Society)를 설립했다.


고든 루스(Gordon H. Luce,  1889-1979)는 양곤의 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로 재직했으며, 생애 내내 미얀마 역사 와 언어 연구, 특히 버강 시대 역사 연구에 힘썼다.


페 마웅 틴(Pe Maung Tin, 1888-1973)은 팔리어 학자로서, 루스와 함께 미얀마의 중요한 역사서인 <유리궁전 연대기(The Glass Palace Chronicle)를 영어로 번역했다.


퍼니발(J. S. Furnivall,  1878-1960)은 식민지 정책에 대한 저술로 유명했다.


스튜어트(J. A. Stewart, 1882-1948)는 미얀마 언어 전문가로서,  미얀마-영어 사전을 편찬하였다. 그는 이후 런던대학의 미얀마어 교수로 재직했으며, 런던대학의 동양, 아프리카 연구대학(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의 동남아시아학부(Department of Southeast Asian Studies)를 설립한 설립자 중 한명이다.


버마 연구회는  버마와 인접국과 관련한 문학조사, 예술, 과학 문학의 장려를 위한 정기적인 토론회를 열었으며, 미얀마인들과 외국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학술 논의를 진행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연구회에서 1911년부터 발간한 버마 연구회 학술지(Journal of the Burma Research Society)는 일본 식민지 시대를 제외하고 계속 발간되었으나, 1977년 미얀마 대통령인 네윈(Ne Win)에 의해 중단되어 현재는 발간 중지된 상태이다.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옷 , 도자기 기구와 같은 기초필수품을 전체국민에게 제공하거나 소규모의 전통 제조업 업 촉진 이외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했다. 미얀마의 공예품들은 인근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다소 품질이 떨어지고 디자인은 까다롭다고 여겨졌다. 이 시기의 인도와 양곤에서는 정기적으로 미얀마 토속 수공예품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술전시회나 산업박람회가 열렸지만, 그다지 품질이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공예품 중에서 칠기, 목조, 은세공 분야는 비교적 발달한 편이었고, 서구에 팔려서 예술품으로 소장되었다. 세계 1차 대전 이전에는 독일 전문가들이 미얀마의 식민 행정을 위해서 일을 했는데, 이때 독일의 박물관들은 상당한 미얀마 예술품들을 소장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미얀마에 대한 초기 관심은 주로 선교를 위한 노력 과정에서 나타났다. 오하이오주 그랜빌에 있는 데니슨대학의 미얀마 예술품 수집은 미국 중부 지역의 선교사 가족들이 수집한 것을 1960년대에 기증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노스일리노이대학의 버마연구재단(Burma Studies Foundation)에서도 미얀마 미술품을 상당수 수집하였다. 버마연구재단은 1980년대 중반에 콘라드(Konrad)와 사라 베커(Sarah Bekker)의 불교 미술품 기증으로 설립되었고,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1948 년 마얀마가 독립하자, 새로 등장한 지도자들은 미얀마의 불교 문화의 우수성을 거듭 주장하였다. 또한 민족 전통 복장의 착용을 권장하고 미얀마어를 국어로 삼았다. 새로 설립된 <사르페이 베익만(Sarpay Beikman,  버마번역협회)>에서는 기술과 과학에 대한 서양 저작물들을 미얀마어로 번약하기 시작했으며, 15권으로 이루어진 백과사전(Encyclopaedia Birmanica)을 출판하였다. 19524월 설립된 연합문화부(Ministry of Union Culture)는 문화협회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국립도서관,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 주립예술학교 등을 두고 운영하였다. 독립후 여러 번에 걸쳐 문화부(Ministry of Culture)의 조직은 개편되었다.


네윈 시대부터  미얀마는 사실상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다. 반대로 인접 신생독립국가들은 국제공동사회에 합류하려고 갈망하면서, 자랑스럽게 박람회를 개최하고 문화적교류를 촉진하여 그들의 예술과 상업제품을 보다 널리 알렸다. 아쉽게도 이 기간의 미얀마 에술은 국외로 밀수출된 것과  급증하는 복제품을 통해서 외부세계로 알려졌으며, 복제품으로 인해 모조품의 범람 현상이 나타났다.


자금조달과 훈련된 인재들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 고고학부서(Department of Archaeology)는 독립이후 나라 전체에 걸쳐 조사와 발굴작업을 수행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보존과 복원 사업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며, 1975년에 일어난 버강의 지진 이후에는 특히 보존과 복원 사업이 유네스코의 협력 아래에서 가장 중시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정부에서는 고고학부서의 책임 아래 왕궁의 재건축과 버강의 유적 복원을 진행하였다. 1996년에는 양곤에 새로운 고고학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1998년에는 버강에도 새로운 고고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1995년에는 고고학대학이 새로 설립되었다.


미얀마의 최근 변화는 희망적이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대외적으로 개방된 의사 교환과 문화 교류 등을 통해서 다양하고 발전된 미얀마 불교 미술의 문화적 특성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