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HK)

홈자료>연구자료(HK)>동남아 개별국

[캄보디아] 노르돔 시하누크 국왕:현대의 신왕

김인아 2014-04-01 00:00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 현대의 신왕


1990 년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지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에 관한 그리 달갑지 않은 내용의 프로필에 의하면, 지난 20여 년에 걸쳐 그는 \"몸을 뒤틀고 돌아서기도 했고, 화가 나 실쭉거리기도 했고, 여러 번 사퇴하기도 했으며, 굴욕을 당하거나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끊임없이 집착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1970년에 상실하였던 체면을 회복하고 의기양양하게 프놈펜으로 복귀하는 바램이었다.\" 이듬해 11 14일에 시아누크 왕자는 정확히 그것을 성취하였다. 13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그의 이전 왕도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는 독립을 맞이하여 망명지에서 돌아왔던 1953년 그 당시처럼, 1991 11월 캄보디아가 지닌 국민통합의 상징을 재현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41년에 18세의 나이로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시아누크가 고분고분한 꼭두각시 왕이 되길 바랬던 프랑스 식민지정부의 책략에 따라 그는 왕좌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볼 때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매우 다른 인물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그 지위를 최대한 이용하여 민족주의 지도자가 되었고, 1953년 독립을 쟁취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 그의 왕위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은 격이 되었다. 1947년 헌법은 국왕의 정치적 역할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친인 노로돔 수라마릿에게 양위한 그는 시아누크 왕자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는 곧장 상꿈 레아스뜨르 니윰(PSC, 대중사회주의공동체)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PSC는 국회의 전석을 차지하였고, 1958, 1962, 1966년에 계속된 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1960년에 부왕이 서거했지만, 시아누크는 왕좌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를 국가원수로 선포함으로써 왕위 계승 문제를 피해갔다. 영국 정치학자 마이클 리퍼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국가원수로서 시아누크 왕자는 문자 그대로 캄보디아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국내외로 캄보디아가 지니고 있는 희망과 공포를 소리 내어 전하였다.... 그는 나라의 국부적 존재로서 특히 농촌 지역에서 존경 받는 대중적 인물로 비쳐졌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서머스 매이는 그의 자서전 \"캄보디아의 증인\"(Cambodian Witness)에서 1960년대 초의 프놈펜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시아누크의 초상화는 도시 어느 곳에나 볼 수 있었다. 칼을 찬 제복이거나 양복 또는 승려의 가사 혹은 아차(achar?)처럼 머리카락을 밀고 흰옷 차림의 모습으로 포스터나 공책에 등장하였고, 학교 교실내의 교사의 머리 위에 걸려있는 액자에도 상점과 관공서에도 초상화는 있었다. 자신이 편집한 잡지에서 그가 관개수로를 내고 있는 농부를 돕는 장면이나, 군대를 사열하거나 영화를 제작하고(그는 영화제작자이기도 하였다) 국회에서 연설하고 승려에게 보시하며, 그의 아내인 모니크와 함께 연례 레가타를 개최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그의 연설과 노래에 열광하였던 1년 동안 하루에도 10번도 넘게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시아누크는 독단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기 좋아했고, 그의 각료들을 하인 다루듯 했다고 한다. 윌리엄 쇼크로스는 그의 저서 사이드쇼(Sideshow)에서 시아누크를 쓸모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성적 만족감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거만한 쇼맨이다. 그는 비평이나 반대를 참지 못한다. 동시에 그는 엄청난 정치적 기술과 매력, 끈기와 지능을 소유하고 있다.\"


1970년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폐위된 왕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이전 시대의 적인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국민연방정부(Grunc라고도 함)라는 이름으로 연대를 꾀하였다. 크메르루즈가 1975년 프놈펜을 장악했을 때, 그들은 시아누크 왕자를 국가원수로 복귀시켰다.


점차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가 1976 4월에 사임하자 Grunc는 해체되었다. 시아누크는 1979 1월 베트남 군대가 프놈펜을 점령하기 수일 전까지 계속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그 후 북경으로 날라갔다. 그곳에서 시아누크와 그 추종자들은 하노이가 지원하는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다시 한번 크메르루즈와 함께 3자 동맹을 맺게 된다.


1989년 베트남인의 철수를 실현시킨 평화협정이 시아누크를 망명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크메르루즈와 맺은 그의 과거의 관계가 왕자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긴 했지만, 많은 캄보디아인들에게 있어서 그는 안정된 미래에 대한 희망의 하나로 나타난다. 1993년 선거 후에 시아누크는 북경에서 돌아와 9 24일 국왕에 즉위하였는데, 이는 1955년 그가 포기하였던 왕좌를 되찾은 셈이다. 노인이 된 그는 전립선암을 겪었으며며, 전해진 바에 의하면 1996년에는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2012년 10월 15일 시아누크는 건강악화로 인하여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