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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민족과 역사

김인아 2014-04-01 00:00

* 캄보디아의 민족과 역사


캄보디아는 힌두 국가였던 후난과 15세기까지 그 지역을 지배했던 앙코르 왕국의 영향하에서 풍요하고 강력한 과거를 누렸지만, 1700년대 중엽에서 1800년대에 이르러 인도차이나에 세력을 강화한 프랑스의 영향 하에 점점 들어가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캄보디아는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거듭 호소한 끝에 186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캄보디아가 안남, 통킹, 코친 차이나,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연방에 편입된 바로 직후인 1884년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세계2차대전이 시작된 후에도 비시 정부를 통하여 캄보디아를 계속해서 통치하였다. 1945년 일본인이 식민지 행정을 해체하였고, 1945 3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송응옥탄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독립 및 반식민 정부를 선포하였다. 이 정부는 같은 해 10월 연합군측에 의해 폐지되었다. 손응옥탄의 많은 지지자들이 탈출하여 크메르 이싸라크를 조직하여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프랑스연방 내의 자치왕국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완전 독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시아누크의 정치력을 지지하는 세력과 크메르 이싸라크 게릴라 운동의 지지세력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1953 1월 시아누크는 그의 부친을 섭정하게 하고, 캄보디아가 진정한 독립을 얻을 때까지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 망명 길에 올랐다.


시아누크의 이러한 행동은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다는 프랑스 정부의 1953 7 4일 공포를 이끌어 내었다. 1953 11 9일 완전 독립이 이루어졌지만,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1954년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릴 때까지 상황은 불확실하게 남았다.


미국과 남베트남을 제외한 모든 참석자들은 (구두로) 최종선언에 합의하였다. 캄보디아 대표단은 인도차이나 3개국의 중립에 동의하였지만, 베트민 또는 타국이 캄보디아 영토를 위협할 경우, 캄보디아 정부가 자유롭게 외국의 군사원조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종전협정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중립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있어서 캄보디아 외교정책의 중심요소였다. 1960년대 중반 캄보디아 동부지역의 일부가 남베트남을 공략 중인 북베트남군과 베트콩(NVA/VC)의 기지로 사용되었고, 시아누크빌의 항구는 이들 군대를 지원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NVA/VC의 활동이 증가하자, 미국과 남베트남은 우려를 나타내고 1969년 미국은 캄보디아 내의 NVA/VC 기지에 대하여 일련의 공습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를 통하여 국내 정치는 다극화되었다. 반대 세력은 파리 유학파 지도자, 즉 손센, 이엥사리, 살로트사(후에 폴폿으로 알려짐)를 포함한 중산층과 좌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함께 캄푸챠공산당(CPK)을 은밀히 조직하여 반군활동을 주도하였다. 시아누크는 이들을 크메르루즈(\"빨간 크메르\"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하지만, 1966년 국회 선거에서 우파는 큰 일격을 당하였고, 론놀 장군이 새 정부를 구성하여 1967년까지 지속하였다. 1968년과 69년 동안, 폭동이 악화되었다. 1969 8월 론놀 장군은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사이에 시아누크 왕자는 1970 1월 신병치료를 위하여 출국하였다.


1970 3월 론놀 장군은 시아누크 왕자를 폐위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손응옥탄은 새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10 9일 캄보디아 군주제가 폐지되고, 국명이 크메르공화국으로 바뀌었다. 하노이 정부는 새 공화국의 NVA/VC 군대 철수 요구를 거절하고, 1954년 북베트남에 있던 캄보디아인 2~4천명을 재침투 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란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은 캄보디아 새 정부의 군대에게 크메르루즈의 반군세력과 NVA/VC의 군대 진압 목적의 물자 원조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1970 5월에서 6월까지 미국과 남베트남 군대가 NVA/VC 군사기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캄보디아로 진군하였다. 상당한 장비가 압수되고 파괴되었지만, NVA/VC 군대는 교묘히 빠져나가 캄보디아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였다. 크메르루즈가 통신망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가하는 동안, NVA/VC는 많은 캄보디아 군사 거점을 장악하였다.


크메르공화국의 지도력은 주요 3대 인물(론놀, 시아누크의 사촌 시릭마딱, 국회 의장 인땀)의 불화로 인하여 곤궁에 빠졌다. 론놀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유로 권좌에는 머물러 있었다.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의회 선거가 치러지면서 론놀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불화, 3만 명의 군대를 20만 명이 넘는 국군 전투병력으로 전환시키려는 문제 그리고 만연된 부패로 인하여 민간 행정력과 군대는 약화되어 갔다.


반란은 북베트남의 물자와 군사 지원으로 더욱 거세져 갔다. 캄보디아 내에서는 폴폿과 이엥사리가 베트남에서 훈련된 공산당원들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였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당하였다. 동시에 크메르루즈 세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한층 더 베트남의 후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1973년 크메르루즈는 독자적으로 정부군에 대항하여 주요한 전투를 치렀고, 이제 캄보디아 영토의 거의 60%와 전체 인구의 25%를 장악하게 되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반군들과 세 차례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74년에 크메르루즈는 사단 단위로 운영하였으며, 사실상 모든 NVA/VC 군대는 남베트남으로 진격하였다. 론놀의 통제지역은 도시와 주요 교통로 주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2백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프놈펜과 다른 도시에 거주하였다.


1975년 새해를 맞이하여 공산군들은 공격을 감행하였고, 117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크메르공화국은 전복되었다. 프놈펜 주변을 둘러싼 동시다발적 공격은 공화국 군대를 묶어두었고, 다른 크메르루즈군은 중요한 하부 메콩강 보급로를 통제하는 포병 기지를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이 지원하던 무기와 쌀의 공수도 미 의회의 캄보디아에 대한 추가 원조 거부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프놈펜과 주요 도시들은 매일 로켓포의 공격으로 시달렸고, 그로 인해 수천 명의 민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프놈펜은 미국이 캄보디아 원조를 중단한 지 5일 째 되던 4 17일에 항복하였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평화가 찾아온 것을 환영했지만, 크메르루즈는 곧장 캄보디아(크메르루즈는 민주캄푸챠(DK)로 명명했다)를 공포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승리 후 즉시 새로운 정권은 모든 도시와 마을의 강제 이주를 명했다. 모든 도시 거주민들은 경작지가 있는 시골로 이주해야만 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제 이주 동안에 굶주리거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도시를 강제로 떠나야만 했던 많은 사람들은 음식과 농기구 그리고 의료 시설도 없는 새로운 마을에 정착했다. 많은 이가 첫 수확기 전에 굶주려 죽었고, 기아와 영양실조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명령을 거역하고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드러난 이전 정권의 대부분의 군부와 민간 지도자들이 당했던 것처럼 즉시 처형되었다.


CPK를 폴폿, 이엥사리, 누온체아 및 손센을 망라하는 파리 유학 경험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1976 1월의 새로운 헌법이 민주캄푸챠를 공산주의인민공화국으로 확립하였다. 여기에 캄푸챠인민대표회의(PRA)의 의원 250명이 국가최고회의의 의장 겸 국가원수를 택하기 위하여 3월에 선출되었다.


시아누크 왕자는 4 4일 국가원수직을 사임하였다. 국가최고회의 첫 회기를 마친 직후 인 4 14 PRA는 키우삼판이 5년 임기의 국가최고회의 의장직을 맡는다고 공포하였다. 또한, 폴폿을 수상으로 하는 15명의 내각 각료를 임명하였다. 시아누크 왕자는 그 때부터 사실상의 가택연금에 놓였다.


새 정부는 캄보디아 사회를 완전히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구사회의 잔재는 없애버리고 불교는 억압하였다. 농업은 집단농장화되고, 산업분야에서 잔재해 있던 것은 폐기되거나 국가 소유로 들어갔다. 캄보디아는 화폐도 은행제도도 없었다. 그 정권은 생활의 제반 분야를 통제하였고, 모든 사람들을 테러를 통한 비참한 복종의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 고문 센터가 세워지고, 그곳에 사망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자세한 기록이 보관되었다. 믿을 수 없거나 전 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공개처형은 흔한 일이 되었다. 군부 감시를 피해 그 나라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5년과 1979년 동안 사망한 사람들의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도 수십만 명이 그 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사형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십만 명이 기아와 병으로 사망하였다(모두 크메르루즈 치하와 1978년 베트남군의 침입 하에서). 전체 사망자의 수는, 1975 7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체 인구 중에서, 100만에서 많게는 300만 명에 이른다.


민주캄푸챠의 베트남과 태국과의 관계는 국경 충돌과 이념 차이로 인하여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CPK는 맹렬한 반베트남주의자이어서 베트남에 살았던 자들의 대부분은 숙청당하였다. 민주캄푸챠는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어서 캄보디아-베트남 갈등은 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을 끌어들여 중소 대결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국경 충돌은 민주캄푸챠의 군대가 베트남의 마을을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CPK정권은 인도차이나연방 건설을 시도하려는 베트남에 반발하면서 1977 12월 하노이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978년 중엽,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우기가 오기 전에 30마일을 진격하였다.


1978 12월 베트남은 전 DK사단장을 지낸 헹삼린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구제캄푸챠연합전선(KUFNS)의 결성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1975년 이후 베트남에 잔류해 있던 크메르 공산주의자와 1978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피신하였던 동부지역 관리들(가령, 헹삼린과 훈센)로 구성되었다. 1978 12월말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에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1 7일에 프놈펜을 점령하고, 민주캄푸챠군의 잔류병력을 태국 쪽인 서부로 몰아 내었다.


1979 1 10일 베트남은 헹삼린을 새로운 캄푸챠인민공화국(PRK)의 국가원수로 내세웠다. 베트남군은 폴폿의 크메르루즈군의 추격을 계속하였다. 폴폿 시대와 베트남 침공 시기 동안 거주지를 잃은 적어도 60만 명 가량이 피난처를 찾아 태국 국경으로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국제사회는 UNICEF와 세계식량계획을 통한 미국과의 공동 협력으로 대규모적인 구제노력에 동참하였다. 4억불이 넘는 원조금이 1979년과 1982년 사이에 모아졌는데, 그 중에 미국은 거의 1억불을 기부하였다.


1989 7 30일에서 8 30일까지 18개국의 대표, 캄보디아 4개 정당,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이 포괄적 타결을 논의하기 위하여 파리에 모였다. 이들은 점령 후의 캄보디아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목표들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 잔류 베트남 점령군의 검증된 철수, 크메르루즈의 권력복귀 방지 및 캄보디아 국민을 위한 진정한 자기결정.


캄보디아에 관한 파리회의는 몇몇 부문에 있어서는 진전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국제 통제기구의 활동, 캄보디아의 독립과 중립을 위한 국제적 보장, 난민과 피난민의 정착을 위한 계획, 캄보디아 경제의 재건 및 휴전의 추진 등이다. 그러나 포괄적인 타결에 관한 모든 참석자들의 완전한 합의는 어려운 듯 보였지만, 8개월간의 협상을 거친 후인 1990 8 28일에 포괄적인 정치적 타결을 위한 골격에 모두 동의하였다.


1991 10 23일 유엔에게 휴전을 감독하고, 태국 국경에 흩어져 있는 크메르 난민을 재정착시키고, 파벌 군대를 무장해제시키며, 캄보디아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준비하는 데에 대한 모든 권위를 부여한다는 포괄적 타결안에 서명하기 위한 파리회의가 재개되었다.


캄보디아 최고국민평의회의(SNC) 의장인 시아누크 왕자와 SNC의 다른 위원들이 캄보디아의 재건을 시작하기 위하여 1991 11월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이와 동시에 파벌간의 연락을 유지하고 태국으로부터 약 37만 명의 캄보디아인을 재정착 시키기 위한 지뢰제거 작업을 개시하기 위해서 유엔 캄보디아진전계획단(UNAMIC)이 배치되었다.


1992 3 16일에 UNSYG 특별대표인 야스시 아카시와 존 샌더슨 중장이 이끄는 유엔 캄보디아과도기구(UNTAC)가 캄보디아에 도착하여 유엔 정착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은 1992 3월 전면적인 재정착계획을 시작하였다. UNTAC은 입헌의회를 위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22,000명의 강건한 민간인과 평화유지군을 투입하였다.


4백만 명이 넘는 캄보디아인들(유권자의 약 90%) 1993 5월 선거에 참가하였다. 실제로 전혀 무장해제되지 않았던 크메르루즈 또는 민주캄푸챠당(PDK)은 그들이 통제하고 있던 지역의 10~15%(그 지역 인구의 6%)의 주민들을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라나릿다 왕자의 FUNCINPEC당이 45.5%로 최고투표율을 받았고, 이어 훈센의 캄보디아인민당과 불교자유민주당(BLDP)이 각각 뒤를 따랐다. FUNCINPEC은 선거에 참여했던 다른 정당과의 연립에 들어갔다. 국회는 새로운 헌법을 기초하고 1993 9 24일에 반포하였다. 전 시아누크 왕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입헌군주국을 토대로 하여 복수정당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하였다. 라나릿드 왕자와 훈센은 각각 로얄캄보디아정부(RCG)의 제 일과 제 이 수상이 되었다.


새 정부의 첫 과제는 PDK를 합병시키는 일이었다. 첫 시도가 실패한 이후, 정부군은 몇몇 주요 본부와 경제 센터를 점령하였다. PDK는 파이린을 탈환함으로써 약간의 복귀를 시도하였다. 협상은 1994 6월까지 계속되었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 해 7 PDK는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PDK는 캄보디아 국민통합 및 구제 임시정부(PGNUNSC)를 세웠다. PGNUNSC는 합법적인 정부로서 인정 받지 못하였다. PDK의 주력 세력이었던 두 개의 사단이 이탈하고 계속되는 평화협정에 관한 협상으로 인하여 수천 명의 PDK 군대가 캄보디아 정부에 투항함으로써 PDK는 상당히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PDK 군대의 연합 및 다양한 정부 내 파벌과 정당으로 인하여 캄보디아의 불안정은 심화되어 갔다.